중국미술(中國美術)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 역대의 회화·조각·공예 등을 비롯하여 각종 예술작품이다. 중국에서는 예술을 애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작하는 것이 지배 계급의 기본적인 교양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書)를 시문과 더불어 으뜸으로 여겼으며, 회화는 서를 보완하는 구상성과 도덕교육에 보탬이 되는 실용성으로 중당기 무렵부터 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청조에 이르기까지 그 인식에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조각이나 공예 등 지식인이 직접 제작에 종사하지 않는 장르에서는, 직인·공장의 산물이라 하여 서화와 같은 취급을 하지 않았고, 이러한 장인 예술을 천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중국미술의 표현형식은 자연주의적 조형이념과 이상주의적 조형이념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 즉, 중국인은 회화나 조각을 만들 때 하나의 모델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늘 이상화되고 관념적으로 다루어진 자연 또는 인간의 재현을 지향했다. 그들은 피·나체·데포르메 등 비일상적 소재를 배제하고, 단정·명결·솔직하고 논리적·사실적인 표현을 정통으로 하며, 숭고·풍만 등 정신의 충실을 첫째 의의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역대왕조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중국미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
중국에서 어느 때부터 회화가 그려지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발견된 유물에서 본다면,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창사고분에서 출토된 비단에 그려진 무녀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국시대의 청동기 중에는 그 표면에 정교한 금은 상감을 입힌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유창한 선의 흐름이 있으며, 정교한 추상화와 적절한 사실성이 있다. 진·한 시대의 회화는 이전의 원시적인 상태를 벗어나고 있었으며, 입체감이 나타나는 공간표현이나 대상의 생동감과 미세한 표현이 가능해졌는데, 무량사 분묘의 석실에 있는 화상석은 인물뿐만 아니라 자연경치까지 묘사되어 있어 후한시대의 회화가 한층 발전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위·진 시대에는 묘사형식에 있어서 한나라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성행하게 되어 불교 그림의 제작이 활발했으며, 노장 사상이 보급됨에 따라 산수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당나라 때는 회화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첫째, 묘선의 발달이 절정에 달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발견한 것이다. 둘째, 감상용 회화가 완성되어 주로 화조산수화에서 전통형식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셋째, 수묵화법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발전에 따라 뛰어난 화가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초기에는 염립본과 위지을승 등이 있고, 중기에는 오도현이 있는데, 주된 사원의 벽화는 모두 그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며 후세에까지 동양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진다. 이 밖에 말그림의 명수 한간, 시인이며 또한 산수화에 능한 왕유 및 이사훈이 있다. 오대 및 북송 초기에는 무법과 선묘법이 결합하여 새로운 화풍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등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송나라 때에는 전대로부터 계승된 사실주의를 더욱 추구하려는 경향이 화원을 지배하였는데, 이것을 원체화라 부르기도 하였다. 원체화는 북송의 곽희, 남송의 이당·마원·하규 등이 산수화에 능하였고, 양해는 산수·인물에 뛰어났으며, 화조화에는 이안충·이적이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체화의 권위주의에 반항하여 사실보다도 정신의 고양을 이상으로 하는 재야의 지식인들 활동도 활발하였는데, 이들은 문인 화가라 일컫는다. 북송의 동원·거연·이공린·미불 등이 대표적인 문인 화가이다. 원대회화의 일반적인 경향은 남송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송회화의 양식을 재인식하려는 움직임이 강했으며, 화원제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면의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가 화풍 전개와는 결합되지 않았다. 원체계 산수화는 자연경치와는 거리가 멀어져 한층 더 형식화되었으며, 북송회화로의 회귀는 이성, 곽희와 동원, 거연의 산수화풍을 종종 한 화풍으로 섞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공망·오진·예찬·왕몽등은 이 같은 화법상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원말의 사대가이다. 이들은 먹에 오채를 더한 것 같은 정취를 나타냈다고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필치를 자유롭게 구사한 그림을 남종화라 하고, 원체화의 흐름을 가지는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딱딱한 느낌의 그림을 북종화라 일컫는다. 명나라 때에는 원나라 때에 해체되었던 화원이 다시 부활하여 화조화에서는 여기, 산수화에서는 대진을 시조로 하는 절파가 회화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절파의 회화는 저장지방형식에 특유의 거친 수묵화법에 이성이나 곽희파의 화풍과 남종화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져 필묵의 기운이 거칠고 호방하다. 명나라 때의 대표적 화가에는 인물화의 구영, 남종화 융성의 중심을 이룬 심주·문징명·동기창이 있다. 청나라 때에는 동기창의 의고주의와 전형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나라 말기에 보였던 자유로운 회화 표현은 후퇴하게 되어 각각 하나의 형태에 꿰어 맞추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 시기에는 남종화가 주류를 차지하였고 왕시민·왕감·왕휘·왕원기·오역·운수평 등 사왕 오운을 비롯하여, 도제·팔대산인 등 개성이 강한 화가가 활약하였다. 청대 중기에는 양주팔괴라 일컬어지는 문인화가가 배출되었는데, 청나라 때의 문인화파는 광학파의 경향을 보였다. 청나라 때의 화원은 가경·도광·연간 이후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청나라 말기 이후에는 전통화법에 만족하지 않고 널리 해외에서 전형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미술전문학교 졸업생에게 많았다. 이후 화단은 문화대혁명에 의해 한동안 정체되었지만, 위페이안·판텐세우·우쭤런 등의 활약은 돋보였다.

▶조각
중국은 옛날부터 서예나 회화는 미술로 생각한 데 반해 조각은 미술로 보지 않다가 조각에 대한 미술적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근대에 서유럽인이 불상 조각에 주목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불상 이전에도 중국에는 높은 예술성을 갖춘 조각이 있었다. 은·주시대의 청동기에 새겨진 동물이나 동그릇 자체도 조각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예와 조각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므로 정확하게 조각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나라 때에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조각작품으로서 석조가 출현했다. 한나라 석조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것은 묘실 내부의 부조화상이다. 분묘석실의 벽면에 새긴 화상석은 비교적 저부조이지만 똑같은 장식에 쓰인 기린 및 사신상 등에는 고부조의 뛰어난 것이 있으며, 제재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있다. 한나라 때부터 성행한 분묘에 매장하는 토우도 조소예술로서 중요하다. 한나라 조각의 특색은 상징적인 표현이 사실적인 표현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뿌리깊은 중국고대의 조소정신의 전통에 새로운 소재의 불교조각이 들어오게 되었다. 즉, 중국의 조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유산을 가진 민족으로서 그 이름을 높인 것이 불상 조각인 것이다.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굴사원의 불상조각은, 그 수와 규모가 거대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둔황·윈강·룽먼·마이지산·톈룽산·샹탕산 등이다. 이 가운데서도 조각이 가지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실증하는 것은 윈강·룽먼이다. 그 후 북위시대 최초의 불상유품은 443년에 만들어진 금동 불입상인데, 이것은 서방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러한 현상은 그 이후의 석불에서도 나타난다. 윈강석굴사원은 북위의 석굴·석상조각의 기점이 되었다. 이것은 군주와 부처의 일치를 설파하려는 북위불교의 특색이 나타난다. 그 밖에도 북조시대의 중요한 조각 톈룽산·샹탕산의 두 석굴 조상은 모두 얇은 옷으로 인해 몸에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조각의 특색이었다. 당나라 때 최초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639년의 석조 좌불상은 당나라 불상의 단정함과 유연함을 보이는데, 이러한 조각의 전통과 양식은 서방조상양식과 관련을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불상조각은 서방의 간다라 양식의 조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인도조각의 흐름을 섭취하면서 점점 중국의 독특한 양식을 완성시켰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를 거쳐 송대에 들어서면 중국의 조각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조형활동은 공예나 회화에 밀려나게 되었다.

▶공예
중국의 공예는 금속공예·도자기·칠공·염직 등 각 분야에 걸쳐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금속 공예]
중국의 금속공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은·주 시대의 동기이다. 그것들은 제사에 사용한 기구로서 갖가지 형태를 나타내고, 그 표면에 새긴 문양은 고도의 주조 기술에 힘입어 세계 다른지역의 청동기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것이다. 청동기의 다양한 종류와 장식은 신석기시대의 양사오문화와 룽산문화의 토기형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청동기로 발달하여 더 복잡하고 화려하게 되었다. 거울의 제작은 다른 금속공예와는 달리 단절 없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중국 거울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BC8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대에 성행한 서방적인 특이한 무늬가 들어간 해수포도경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자기]
중국의 도자기는 수 천년 전 선사시대 황하강 유역에 옮겨 살았던 한족의 조상들이 훌륭한 솜씨로 만들었던 채도에서 시작되었다. 채도에 이어서 나타난 것이 가늘고 아름다운 광택을 가진 토기인 흑도이다. 은나라 때에는 동기문화가 최고조에 달했는데, 동기뿐만 아니라 회도라는 조악한 도기가 만들어져 사용되었고, 유약을 쓴 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청자가 일부지방에서 만들어져, 1, 250∼1, 300℃의 온도에서 구워 내는 경도의 기원은 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오래이며, 당나라 때에는 웨저우요의 청자, 싱저우요의 백자가 유명하고, 주로 부장품으로 쓰인 당삼채는 흰색·황색·녹색 등 세 가지 색깔의 유약으로 만든 도기이다. 송나라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기의 완성기라고 할 만큼 황금시대를 맞아, 양적으로 증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것이 만들어졌다. 상아와 같은 바탕에 백자를 구운 허베이성의 정요, 예조의 문양에 유약을 칠한 백자를 구운 여요는 다 같이 북송을 대표하는 명요이다. 특히, 웨저우요에서는 아름다운 녹색의 투명한 유약이 바탕을 이루고, 그 아래에 음각의 문양이 있는 훌륭한 청자가 만들어져서 하늘색 청자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밖에 하늘색 유약에 홍반·자반이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산출한 소위 균요, 긁어서 무늬를 그린 서민적이고 생명력 있는 허난성 수무요의 도자기, 그리고 중국 최대의 도요지로서 세계에 알려진 징더전요에서는 잉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자기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순백의 바탕에 엷은 비색을 띠고 있는 자기이다. 남송의 수내사요와 교단요는 청자를 굽던 관요였으며, 항저우 근처의 룽쥐안요는 중국 최대의 청자 산지였다. 지저우요에서는 대피잔이라는 별갑색을 인위적으로 내서 이것을 기조로 한 각종 술잔이나 찻잔 등 공예적 기교를 다한 것이 나왔다. 푸젠성의 건요에서도 차의 유행과 함께 흑유의 찻잔을 만들었다. 원나라 때에는 남색자기와 적색자기가 등장했다. 명나라 때에는 양상이 바뀌어 송나라의 청자나 백자가 무지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하에 코발트의 청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청화자기와 오채자기가 매우 성행한다. 청화자기나 오채자기는 징더전요에서 창시되었는데 명나라 초기 징더전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징더전의 우위는 확고해졌다. 선덕요의 청화는 뛰어난 작품이었고, 가정요의 청화·오채도 호화찬란하고, 작품 역시 변화무쌍하였다. 만력요는 명나라 자기의 절정기로, 외국에까지 많이 수출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징더던요는 작업을 중단했는데 이후 청나라에 와서 재건되었고, 감도관, 장응선의 취임 이후 크게 발전했다. 이어서 세종·고종 때 감도관들의 노력으로 징더던요는 절정기에 이르렀다.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갖가지 새로운 기법이 개척되고, 옛 기법의 재현도 시도되어 정교한 자기가 제작되었다. 청화·오채 외에 강희의 소삼채·낭요·옹정의 두채·분채, 건륭의 분채·협채 및 갖가지 단색채는 청나라를 대표하는 자기들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징더전요는 심히 퇴폐하여 중국의 도예는 쇠퇴하게 되었다.

[칠공예]
중국에서는 매우 오래 전부터 칠이 사용되었는데,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순제시대부터 칠을 사용했다 한다. 중국의 칠공예품 중에서 현재 가장 오래 된 것은 서주시대의 유품이다. 원래 칠에는 견고성이 갖추어져 있어 기물을 보호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장액이다. 이러한 칠의 특질을 알게 된 중국인은 거기에서 지속성·영속성을 찾아 내었다. 칠공예가 활발히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이다. 이 시기에 유행한 가식기법은 거의 칠화에 한정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러서 중국의 칠공예는 더욱 현저하게 발달했다. 장식에 따라서 평탈·나전·목화 등 매우 다양하다. 무늬는 매우 변화가 풍부하며, 종류도 다양하여 동식물무늬, 인물무늬, 기하학무늬, 당초문 등이 있다. 무늬의 구성에 있어서도 회화적인 것, 대칭적인 것, 선회식, 방사식 등이 있다. 송나라에 이르러서 칠공예는 조칠과 무문칠기가 주축을 이루어 발달하게 된다. 조칠은 이미 당나라 때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송대에 이르러 성행한 듯하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전혀 가식하지 않은 흑칠도 칠공법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송나라의 무문칠기는 동시대의 청자나 백자와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이것들은 단정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송나라 공예의 일면을 보여준다. 칠공예의 기법은 거의 송대에 갖추어졌는데 칠공예의 제작지로는 항저우의 것이 가장 많다. 원대의 칠공예 산지는 저장성이 중심인 것으로 추측되고, 이 시기에는 장성·장무와 같은 명공이 배출되어 조칠에서 뛰어난 조형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러한 원대의 기법은 그대로 명대에 답습되어, 관영인 과원창이란 공장이 설립되어, 훌륭한 작품이 잇달아 제작되었고, 이 시기에는 조칠이나 나전 외에도 칠회·밀타회 등 많은 종류의 기법이 발달되기도 했다. 명나라 때 눈부시게 발달한 칠공예는 청대에 들어서면서, 그 기법들이 계승되어 세밀화되었지만, 기법과 무늬가 복잡하게 되어 종래의 칠공예에서 볼 수 있었던 풍부한 조형감각이 사라지게 되었다.

[염직]
중국의 염직은 중앙아시아의 누란지방과 외몽골의 노인울라에서 출토된 유품을 통해서 이미 한나라 때 뛰어난 견직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조로부터 삼국을 거쳐 수나라 때까지 한나라 염직의 전통이 이어졌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서방과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문양이나 기술면에서 서방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이 정점에 달했다. 그 예로 비단에 색실 사용법의 날실에서 씨실로 이행된 것도 이란의 사위금의 유입이 직접적 자극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송나라에 들어서서 중국의 염직품은 세계적인 것으로 확립었는데, 이것이 원나라 때에는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들어서면서 송나라로의 복귀라는 르네상스적 기풍과 인도·유럽과의 교류로, 더욱 순화되어 화려해졌다. 금란·단자·간도 등과 같은 염직품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염직 공예는 표면적인 화려함을 추구한 나머지 말초적인 기술만 발달하게 되었다.

[건축]
중국 건축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건축은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게다가 일찍부터 고도의 건축기술이 발달되어 특색 있는 양식이 완성되었다.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건축유적은 신석기 말기의 것이다. 이후 은나라 때 건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도시둘레에 성벽을 쌓았고,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은나라 뒤를 이은 서주시대에는 지붕 기와가 발명되어 중국 건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기와의 모양은 오늘날 사찰 지붕 등에 사용하는 암키와와 같은 계통의 기와라고 할 수 있는데, 암키와와 암키와 사이에 엎어 놓는 수키와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에 있었던 암키와만으로 지붕을 이는 수법은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암키와와 암키와 사이의 틈을 메우는 수키와가 고안되어 암키와와 수키와로 지붕을 이는 새로운 수법이 전국시대에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처마 끝에 사용하기 위해 와당도 만들어졌다. 이후 진의 시황제 때에는 만리장성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도로건설이 이루어졌고, 전국에 700여 개의 별궁과 궁전이 세워졌는데, 이 기술은 한나라에도 이어졌다. 한나라 때의 건축은 더 다양해지고 복잡함과 화려함을 추구하게 되어 바로크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쓰촨성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풍환이나 평양의 석궐을 보면 그 경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육조시대에는 불교가 뿌리를 내려감에 따라 석굴과 탑이 세워졌는데, 석굴은 바위산 절벽에 옆으로 굴을 파서 불상 등을 조각한 일종의 절이다. 당나라의 건축물로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탑인데, 흙벽돌로 쌓은 전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전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벽면에 기둥모양이나 가로대를 만들고 두공을 늘어 놓아 처마를 받치게 한 형태의 탑이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 목조건축양식을 전탑에 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서역의 건축기법을 중국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북송시대에는 도성건설과 궁전이나 관청 같은 큰 건축물을 지으면서 건축술도 규격화·공업화되고, 목재도 축소되는 발전을 이루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북송말기 이명중이 지은 <영조법식>이라는 건축술 전문서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명나라 이후에는 무량전이라고 하여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흙벽돌과 돌만을 쌓아 올린 조적 구조의 건축물도 있다.

[서예]
서예는 중국 미술 가운데 회화와 더불어 독립된 예술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자를 감상의 대상으로서 보는 서법 의식이 싹튼 것은 한나라 때부터이며, 동진의 왕희지에 의해서 그 때까지의 기교를 종합하고 그의 창의를 가미한 서법이 완성되었다. 중국의 서예는 이 왕희지의 서풍을 숭상하는 전통파와, 그것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서예를 창조하려는 혁신파의 두 큰 흐름이 있다. 당나라 때에는 구양 순을 비롯하여 왕희지의 전형에 따르는 세력이 강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전통적인 서체에 반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소식·황정견·미불 등은 주관을 존중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서체를 형성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조맹부가 복고주의를 제창하였다. 중국에서 서예는 한자 발생 이래 3500여 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서체의 변천을 거듭하면서 발달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