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상(中國思想)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 지역에서 중국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지고, 발전되어 오면서 계속적으로 펼쳐진 전통적인 사상. 그 기원이 고대 그리스·인도 등지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독자적인 성격의 전통을 형성하며, 우리 나라를 비롯한 일본·베트남·태국 등의 동양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형이상학적 세계를 뒤쫓기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대한 이상주의 사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내려온 유교 사상과 노장의 도가 사상이다. 유교에서는 도덕과 정치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노장에서는 궁극적으로 국가나 단체보다는 낱낱의 개인이 탈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것은 전반적으로 감각을 중요시하는 데서 온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만져지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틀림이 없으며 거짓이 없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감각을 중요시한 견해는 과학적인 사상과 유물론적인 사상과 이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쪽으로는 낱낱의 물체의 객관적 관찰보다는 그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하나로 합쳐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사상의 주축인 현실주의적 경향 외에도 상대 개념의 사고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상대 개념은 다른 개념과의 비교에 의하여 그 뜻이 보다 확실하여지는 개념, 즉 모든 사물을 상대되는 두 요소로 구분지어 파악하는 사고 방법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음양 사상으로, 단순하게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이질적인 것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아닌 상호 연관적으로 보며, 아울러 양자의 조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이는 치우침이나 또한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는 떳떳하고 알맞은 상태의 '중용'을 중시하는 사고와도 서로 연관된다. 또 다른 중국 사상의 주류적인 특징으로는 '천(하늘) 사상'인데, 중국인들은 고래로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대한 신앙, 또는 숭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천은 단순히 자연 현상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조물주 또는 조화의 근원이며, 권위 있는 명령자·통솔자로 일컬어진다. 자연계인 우주와 인간계인 인생을 주재하며, 이런 작용은 모두 하늘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를테면 사람은 하늘을 거스르지 말아야 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사상적 주류는 이단적 사상인데, 이는 하늘을 자연 그 자체로 보고 인생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단 사상은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 나름대로 세력이나 형세가 강하였지만 정통 사상이 그 영향력을 널리 퍼져서 골고루 미치게 한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즉 중국 사상의 주요 주류는 '현실주의 사상'과 '상대 개념의 사고'와 '천(하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 사상으로 근대와 현대의 중국의 사상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중국의 사상사의 역사적인 변천의 시대 구분은 일반적으로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아주 먼 옛날부터 전한 말엽의 성제·애제 시대(기원전 1세기 말엽)까지인데, 중국 사상이 성립된 시기는 은나라 때인 기원전 15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은나라 때에는 제라고 불리우는 최고의 인격신인 하늘의 신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으며, 각각의 씨족의 조상신·산신·강신·초목신 등 잡다한 자연신을 숭앙하여 이들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무사 평안을 기원하였다. 또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점을 쳐서 신의 뜻을 확인한 연후에야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제의 의식은 주나라 초기의 천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주나라의 성립을 무력이 아닌,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천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경우 천의 사상은 종교적이며,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덕이라는 인간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중국 사상이 이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또한 주나라 초기에는 '주례'가 제정되었다. 이는 하늘과 그 밖의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 의식이며,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정치 형태이며, 신분 제도를 규정하는 예제였다. 중국 사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춘추 시대 말엽부터 전국 시대(기원전 3세기 말)이다. 이 시기는 중국 사상사의 황금기로, 제자 백가로 불리우는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 유가·묵가·명가·도가·법가·음양가의 6가는 중요한 사상가들이다. 유가 사상은 제일 먼저 나온 것으로 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자와 순자 등으로 이어지면서 세력이 강해진 학파이다. 유가는 전통적인 예에 근거를 두어 인륜과 도덕을 중시하였다. 인·의·예·지·신 등의 덕목을 강조하는 것과 아울러 정치에 있어서는 통치자의 덕에 의하여 민중의 교화를 이루려는 이상주의적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덕치의 구상은 나를 다스린 연후에 나라를 다스린다는 수기치인의 도라 하여 그 뒤에도 계속 유가 사상의 기본을 이루었다. 예와 질서를 중요시하는 수기치인의 도를 주장한 유가 사상은 통치 계급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이다. 묵가 사상은 묵자를 대표로 하는 데 유가 사상처럼 인과 의를 주장하는 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유가가 중요시하는 예의 사상을 비판하며, 나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 사랑에 입각한 차별적인 사랑임을 극복하려고 한 겸애 교리·아껴 쓰는 절용·전쟁을 배척하는 비공 등의 공리주의를 펼쳤다. 명가 사상은 사람의 인식과 언어의 논리를 분석하고 고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혜시와 공손룡 등이다. 명가의 논리에 의한 고찰은 도가의 '무' 사상의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 도가 사상은 노자와 장자를 대표로 현실적인 입장에서 인간만을 파악하려는 입장을 비판함과 동시에 현상의 내면을 주시하고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파악하려 하였다. 도가에서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집착을 뛰어넘어 절대 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실로 자기를 완성하는 삶의 방법이라고 하였으며, 자연성과의 통일성를 강조하였다. 즉 상식적인 사회 생활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이었다. 법가 사상은 상앙과 한비자를 대표로 하여 유가에서 중요시하는 자연 발생적인 '예'를 부정하고 시대 변화에 적합한 실정법을 제정하여 공포하면서 신상필벌주의에 의하여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그 법을 엄격하게 지키게 하였으며, 부국 강병을 도모하고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애썼다. 즉 봉건제에서 중앙 집권 체제로 옮겨가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른 학파와는 달랐다. 추연으로 대표되는 음양가 사상은 음양과 오행(金·水·火·木·土)을 원리로 하여 자연계와 인간계를 총망라하여 사상이 성립하고 변화하는 모든 양상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 사상의 여러 분야들은 춘추 전국 시대 말엽(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의 초기(기원전 2세기 중엽)에 걸쳐 각 방면에서 사상과 이론적인 체계가 정비되었다. 또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그 뒤를 이어 한나라가 강력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 사상을 이론화시킬 정치 철학이 요구됨과 동시에 사상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진나라 때는 법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유가는 심한 탄압을 받았고, 한나라 때는 법가 사상을 토대로 하여 노자의 설이 통치술에 도입되었으나, 무제 때(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유가 사상을 존중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무제는 유교 사상으로 천하의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는 뜻의 동중서의 건책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화하였다. 이를테면 전한 시대 말 성애·애제 무렵에 이르러 그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제자백가의 여러 가지 사상 중에 유가 사상만이 정통 사상으로 인정을 받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 시기가 제2기의 시발점이다. 제2기의 사상사를 알아보면, 유교 숭상 정책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왕망에 의하여 강화되었으며 한나라 시대의 지배적인 이론은 유학자 동중서의 유교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이는 신비적인 음양 사상과 서로 연관된 천인 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가 있어 하늘의 뜻이 인간 세계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받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유교는 여기에다 신비적인 면을 가미하였으며, 한 무제 때에는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한 시대와 후한 시대에는 음양 오행 사상이 널리 유행하였는데, 이는 본래 과거의 음양가의 계통을 뒤이은 사상이었다. 음양과 오행이 변화되고 결합됨에 따라서 자연 현상과 인간 세계의 사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사상적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비합리적이고 이데올로기화된 사상은 신비적이고, 미신적 경향을 부추기게 되었다. 후한 시대의 왕충은 이를 비판하고, 하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미신 타파에 정열을 쏟았으나 그의 비판적인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데 있에서는 많은 한계 상황에 부딪쳤고, 그 영향도 보잘것없었다. 이후 후한의 정치 권력이 붕괴되기에 이르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장 사상이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위나라 시대와 진나라 시대(3∼4세기)에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으로 무위(無爲)·자연을 도덕의 표준으로 하여, 허무를 우주의 근원으로 삼는 노장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귀족 등 상류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논의나 인물 평론과 더불어 현학이라고 불리우는 철학적인 논의가 유행하였는데, <노자> <장자> <역경>의 삼현이 화제가 되었다. 죽림칠현으로 널리 알려진 청담도 이런 종류의 담화와 논의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2기 초엽인 것으로 추정된다. 맨 처음 불타는 신선시되었지만 곧 명상에 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밝은 지혜를 얻는 가르침으로 이해되었다. 불교는 3∼4세기의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로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서 널리 유행하여 수많은 대승 불교의 경전이 들어와 번역되었다. 대중들에게는 교의를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위나라 시대와 진나라 시대에는 노장 사상을 비롯하여 중국 재래의 사상이나 그 용어를 빌려와 설명하게 되었다. 6세기 말부터 9세기에 이르는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에는 명승이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 수나라 때에는 길장을 위시한 삼론종과 지의를 대표로 하는 천태종, 신행 등의 삼계교 종파가 성립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법상종, 화엄종, 율종, 밀교, 혜능·신수 등을 대표로 하는 선종, 선도를 위시한 정토교 등 많은 종파가 성립되어 중국 독자적인 불교가 확고히 서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로부터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와서는 외래의 불교와 신흥 도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제2기에 있어서의 사상의 주요 계층은 후한 말엽의 호족, 대토지 소유자 등의 귀족층 계급이었는데, 당나라 후반기에 그 귀족 세력은 쇠퇴하였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 십육국 시대의 군웅 할거 시기를 거쳐서 송나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지주 계층에 의한 관료 제도로 버티어 나가는 군주 독재 정치가 이루어졌고, 이 지주 계층과 관료 계층의 사상으로 새로운 유학이 형성되었다. 제3기의 경우는 신유학이 전개된 시기로 신유학은 송학이라고도 불리운다. 정치의 주류를 이룬 인물은 세습된 귀족이 아닌 과거로서 등용된 신흥 인재들이었다. 사상계는 이러한 신흥 인재들에 의해 활발해졌으며, 당나라 말기의 한유도 이 중에 속하는 한 사람이었다. 이는 불교의 철학적 논리에 대하여 유교의 입장에서 서서 새로운 인생 철학을 세우려는 것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이를 송학 혹은 이학이라고 하는데 유가 철학을 제창한 한유·이고 등은 제2기에서 제3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약하였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유가 철학은 주희에 의해서 마침내 완성되었는데, 11세기 북송의 주염계, 정명도·정이천 형제, 그리고 장횡거 등의 사상가에 의해 사물 본연의 상태를 규정하는 존재의 원리인 이(理)의 철학과 물질의 근원이라는 기(氣)의 철학, 즉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이는 기보다는 이에 그 근원적 존재를 우위에 둔 '이의 철학'의 입장이었다. 사람의 성(性)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이는 곧 성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사람의 '성'은 순수하고 선한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원나라 무렵에는 과거 시험에 경전의 해석으로 주자학계 주석설이 채택되어 쓰여졌다. 15세기 초 명나라의 영락 시대 이후에는 관학으로서 주자학이 더 튼튼해졌으며, 이는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의 흐름 외에도 북송의 구양수의 실증주의와 왕안석과 남송의 영가학파 등에서 나타난 실리적 공리주의 사상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는 전체적으로 존재의 근원과 심성의 본질을 생각하는 내성적이고 사변적인 사상이 지배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자학에 대응하여 육상산의 심학이 나왔다. 이 사상은 명나라 중기의 왕양명에 이르서 양명학으로 완성되었다. 양명학은 심(心)이 바로 이(理)로서 심 외에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하였다. 양명학은 심을 인지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는 '심즉리', 지(知)는 행(行) 즉 체험을 통해서만 확실해진다는 '지행합일', 자기 마음의 양지(良知) 즉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를 신뢰하고 양지의 판단대로 행동하라는 '치양지'의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하는 실천 중시의 철학이었다. '심즉리'나 '지행합일'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 또는 정치의 질서 원리로서만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명학이 완성된 것은 '치양지'의 수양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양명학도 17세기 초반까지는 널리 유행하였지만 그 후 쇠퇴하였다. 그 대신 17세기 중반 무렵인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의 혼란기에는 학문은 세상으로 다스리는 데에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실학이 제창되었다. 황종희와 고염무가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한인에 대한 압력을 바탕으로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정세가 안정됨에 따라 실학의 요소는 약해졌고 18세기에서부터 19세기 초기에 걸쳐서는 고문서를 실증하려는 고증학이 학계와 사상적 흐름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고전의 연구에 대한 성과로 기존의 고전 해석에 대한 수정이 이루었졌고, 19세기에는 정치색이 짙은 공양학이 널리 유행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정치를 개혁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활발하였던 중국의 불교는 선종과 정토교가 남아서 본종과 그 지파를 동시에 취한 융합적이고 민중적인 불교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불교 경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선정을 통하여 스스로 불교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며, 정토교는 염불로써만 극락 정토 왕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특히 민중적인 가르침인 정토교는 폭넓은 귀의를 얻게 되었다. 당시 불교 내부에서는 선종과 정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에는 다시 유·불·선 삼교합일론이 제기되어 도교에서는 이런 삼교합일론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여 인과 응보와 권선 징악 사상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하고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을 지향한 책인 선서가 주로 만들어지고 널리 퍼졌다. 16세기 말 명나라 말기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톨릭을 중국에 전해왔으며, 포교 활동을 통해 지식층과 민중들이 신자가 되었지만 크리스트교 자체보다는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의 수학·천문학·측량·수리·병기 등에 대한 과학 기술이 더욱 환영을 받았다. 이 가운데서도 천문 역학 부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그 훌륭함을 인정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채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 여러 나라의 학문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통하여 중국인의 지적인 자극을 주어 학문의 진보가 많이 이루어졌다. 제4기는 전통 사상이 변모된 때로 중국인의 사상이 근대화하기에 이르른 시기이다. 중국은 아편 전쟁(1841∼1842)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의 자본주의 경제가 중국에 들어옴에 따라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이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사상계였으며, 공양학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춘추공양전>의 이론을 다시 내세워서 어려운 국내 정세에 대처하는 개혁 사상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는 소위 격식에 벗어난 변격 이론으로서 청·일 전쟁(1894∼1895) 이후의 캉 유웨이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서양의 침입은 한편으로는 중국의 전통 사상을 그 밑바탕으로 하여 서양 문물을 이용함으로써 행복과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중체 서용론'을 일으켰다. 중체 서용은 중국 양무 운동의 기본 사상으로 중국의 유학을 바탕으로 하되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양하였는데, 이는 멸만 흥한 즉 만주족이 망하고 한족이 흥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건 반청조적인 면과 외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배외적인 부분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간 사람은 혁명 사상가인 쑨 원이다. 그의 운동은 오랜 왕조 체제에서 민주 정치를 행하는 민국으로 옮겨가는 신해혁명(1911∼1912)을 성공시켰으며,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 민국이 수립되게 되었다.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는 민족·민권·민생으로, 유교적인 바탕 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보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북양의 군벌인 위안 스카이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혁명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이 중국에 내놓은 21개조의 요구에 대해서 중국인의 불만이 터져나와 삼민주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 운동이 1919년 5월 4일에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 운동으로 시작되어 현실화되었다. 이 항의 운동이 전국 각 지역으로 널리 퍼졌데, 이는 정치 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문화 혁명의 측면에서 5·4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류를 이룬 사상은 중국의 현재의 상황을 외부 세계에서는 반식민지, 내부에서는 반봉건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보고, 반제국주의 사상과 반봉건주의의 사상에서 전통적인 사상을 비판하고, 완벽한 근대화를 이루려고 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민주주의와 서양 학문 중에서도 과학을 받아들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어느 정도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1921년에는 천 두슈 등이 중국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며, 쑨 원이 중심이 된 국민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아 국·공 합작으로 국민 혁명을 밀고 나갔다. 그 후 장 제스가 쑨원의 뒤를 이어받아 북방의 군벌을 쓰러뜨리기 위한 북벌에 성공하였고, 난징(남경)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장제스는 주석의 자리에 올라 복고조 정책의 입장에 서서 공산당과 대립하게 됨으로써 국공 합작은 깨졌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7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인 중·일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국에는 항일 전쟁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마오 쩌둥이 주석의 자리에 앉이 되었으며, 제2차 국공 합작이 결성되어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시 국공의 내전이 되풀이되어 결국 1949년에는 공산당에 의해서 중화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신민주주의 노선에 근거를 두어 그 입장에 선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근대의 마오 쩌둥 이후의 모든 상황은 일반적으로 바라보면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의 흐름과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사상의 성격을 깊이 고찰해 보면 전통적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그 힘이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다. 또한 먼훗날에도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