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극(中國演劇)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에서 발달한 연극. 중국의 전통적인 연극은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가창을 중심으로 하여 대사와 연기, 음악을 종합한 가무극 형식의 예술로서 발달되었다. 특히 배우가 부르는 노래가 중요시된 중국의 연극은 보는 것보다도 듣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구성면에서는 역사나 일반 대중을 통하여 계승된 것을 바탕으로 뛰어난 서사적인 형식이 나타났다. 중국의 연극은 과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화의 중심을 이루면서 각 시대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중국 연극의 기원은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시 시대의 노래와 춤에서 출발하였다. 씨족 사회의 사냥 생활과 농경 의식에서 비롯된 연극은 계급 사회에 이르러 순수 오락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이 기원전 10세기 전후의 서주 때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무격의 가무로 발전하였고, 서주 말년인 기원전 771년에는 귀족의 지배 아래 놓여 오락을 전업으로 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우(優)가 나타났다. 오늘날 배우의 기원이 바로 이 우이다. 기원전 202∼서기 220 한나라 때에는 중국 서쪽에 있는 여러 나라와 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되어 2세기경에는 가무, 익살스런 연극인 골계희, 곡예, 남의 눈을 속이는 기술인 환술 등이 민간에 널리 퍼졌다. 이들을 모두 한데 모아 '백희' 혹은 '산악'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는 가(歌)·무(舞)·악(樂)·우(優) 등의 종합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 때에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악부가 설치되어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가요를 찾아서 모았으며, 수나라 양제 때에는 매년 정월마다 그 규모를 늘여‘백희'를 말과 동작으로 재주를 부리는 연희 행사를 벌였다. 게다가 당나라 현종 때에는 오늘날 극단의 기원이 된 이원이 만들어졌으며, 이 곳에서는 300명에 이르는 궁정 전속 배우가 양성되었다. 이 시기에 <대면> <발두> <답요랑> 등이 공연되었다. 이는 가무와 음악이 합쳐진 형태의 가면극이었는데, 노래와 음악 그리고 씨름이 중심이 되고, 줄거리는 보조 역할을 한 것이었지만 점차 종합화되었다. 이 밖에도 배우인 우의 연기가 세련되자 참군·창골 등 두 가지 역할을 가지고 주로 대화로써 두 배역이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연극인 참군희가 생겨났다. 이는 모두 '백희'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 당시의 모든 연극·영화·음악 등에서 주류가 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궁정의 교방에 있는 연예인들도 시민들 앞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사원에서도 속강과 더불어 여러 가지 공연이 이루어졌다. 궁정에 소속된 예능인의 민간 공연은 민중들의 취향에 맞도록 연극 내용을 고쳐가는 무대였으며, 민중 예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북송대는 참군희는 잡극이라고 해서 5명의 연기자가 나와 연기하는 소극으로 발전되었으며, 상설적인 공연 장소로서 극장인 구란도 생겨났다. 또한 상업의 규모가 확대되자 예능인들은 교방에서 벗어나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어 북송의 수도 개봉에는 갖가지 예능을 보여 주는 구란이 모인 극장가인 '와사'가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는 인형극과 꼭두각시놀음 그리고 각저 경기가 공연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잡극'이 여러 종류의 예능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송잡극은 참군희보다 복잡하였으며 배역도 다양하였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연극 목록에는 하층 계급까지 등장하여, 세상을 풍자한 익살극이 많았다. 이 시기에는 송나라의 남천후와 잔류해 있던 북쪽의 예능인들이 금나라의 수도인 연산에 모여들어 북방파의 잡극과 금나라의 '원본'이 이루어졌다. 배역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송잡극과 같았지만, 거의 현대의 연극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었다. 형식에 있어서 구성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연극의 내용이 이어졌으며, 여러 막으로 이루어졌다. 12세기 초에 접어들어서는 송잡극과 각종 연예를 남북으로 구분하여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북방에서는 북잡극이 형성되었고, 남방에서는 남희가 형성되었다. 북쪽의 금나라에서는 '원본' 속에 잡극이라는 새로운 희곡 형식의 연극이 생겨났으며, 남쪽에서는 북쪽의 잡극이 내려와 융성하였다. 이 때부터 원본과 잡극을 위한 희곡 창작이 활발해졌다. 북방 계통의 음악을 기본으로 한 것을 통틀어 '북곡', 남방 계통의 것을 '남곡'이라고 하였다. 원나라 시대에는 북송의 잡극과 금나라 원본의 흐름을 잇고, 노래를 중심으로 대사로 엮어진 '제궁조'의 형식이 보태어짐에 따라 4막으로 구성된 원잡극인‘원곡'이 성립되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원곡의 중심지로서 많은 작가를 배출하였다. 관한경의 <두아원>, 왕실보의 장편 <서상기> 등이 이 때 발표된 작품들이다. 특히 <서상기>는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최초의 극문학인 원곡을 꽃피웠다. 원곡은 '북곡'의 연극 형태로, 배역도 말(末:주역)·단(旦:여자 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정(淨:악역)·축(丑:익살스러운 역)·잡(雜:단역) 등 20여 가지였다. '원곡'은 남송이 멸망한 뒤에 운하를 통한 수로 교통이 다시 원활해지자, 빠른 속도로 강남의 도시에 널리 퍼져나갔으며, 그 중심지는 항저우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원곡'이 쇠퇴하면서 남쪽에서는 남송 잡극과 민간의 악곡이 한데 합쳐진 '남희'가 남송의 수도 임안(항주)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남희는 연극적으로 보다 더 발전하였고 '전기'라 불리우는 여러 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의 극작가인 탕현조·심경 등 여러 극작가들이 나오게 되면서 중국 연극은 다시 발전을 맞았다. 원곡이 민간 예술로서 발전한 데 비하여 명나라 전기에는 귀족층의 예술로 되돌아가 고상하고 멋이 있으며, 화려한 색채를 띠었다. 남희는 원래 12세기 말에 처음으로 윈저주(온주) 지방의 민간 연예였던 온주 잡극이 발달한 것이다. 남희는 막의 수에도 제한이 없었는데, 장편인 경우에는 50막에 이르는 희곡도 있었다. 남희는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뒤에는 북잡극과 서로 연관 관계를 가지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하였다. 북잡극이 원나라 말엽과 명나라 초엽에 와서 쇠퇴하였으나 남희는 널리 유행하였으며, 희곡 문학의 융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명의 <비파기>를 비롯하여 원나라 말기에는 <형채기> <백토기> <배월경> <살구기> 등의 4대 걸작이 나왔으며, 이 외에도 많은 신작이 나와서 <남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북잡극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였으나 남희는 한층 더 발전하였다.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지방에 알맞는 성강(곡조)의 장르를 낳았다. 이는 곤산강·해염강·여요강·익양강 등 사대 성강이 되었다. 또한 북곡과 남곡의 특색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데 북곡은 북방의 어음(語音)과 곡조에 맞추어 7음계의 악곡을 쓰면서 현악기 반주에 의한 힘차고 강한 표현이 중심을 이루었다. 남곡은 남방의 어음과 곡조에 맞추어 피리 반주를 주로 하는 5음계의 부드러운 악곡이 중심이었다. '전기'의 곡조인 남곡은 원나라 말엽부터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가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의 가수 위양보 등이 새롭게 정리를 하였다.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 곡조에다가 북곡의 좋은 점을 가려 뽑아 섬세하고도 우아한 '곤산강(곤곡)'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완사기>가 양진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면서 '해염강'을 밀어 내고 빠른 속도로 도시 무대에 널리 퍼졌다. 과거의 북잡극의 자리를 곤산강과 익양강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청나라 초엽까지 남희에서 발전된 '전기' 형식의 각본 창작이 과거에는 그 예가 없을 정도로 융성해졌다. 이후로부터 중국 연극에는 곤곡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17세 중엽 청나라 초기까지 전기의 이 곡조에 의해서 상연되었다. 곤곡은 피리 반주를 중심으로 음악에 맞춘 율동성이 강하였으며, 엄격하고 철저한 문학의 형식을 존중함으로써 온화하고도 아담하며 고상한 연극으로 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무대의 연출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배역은 생(生:주역)·단(旦)·정·축·말(단역) 등 원곡이나 남희보다도 더 치밀하게 나누어졌고, 검보(얼굴 분장)가 처음으로 고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인물 신분과 성격에 대한 표현력도 한층 더 깊이 있고 심오해졌다. 의상에 있어서도 명나라 시대와 그 이전 시대 것의 공통된 성질을 뽑아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연극 의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치나 소도구도 여러 가지 형태나 색채, 종류들이 변화 있게 어울리어 호화스럽게 만들어졌다. 즉 중국 연극의 기본적인 형식은 대체로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기 작품은 청나라 시대에도 <장생전> <도화선> 등의 뛰어난 작품이 나왔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대부층이 정통으로 삼아 '아부'라고 일컬어졌던 곤곡도 얼마 안 되어 쇠퇴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18세기 초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민간 지방극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민간에 널리 퍼져, 발전된 익양 제강을 이어받고 곤산강의 예술성도 흡수하여 희곡 형식을 새롭게 바꾼 것으로, 그 형식상의 특징은 리듬의 변화를 주는 데 있다. 명나라 시대에서부터 청나라 시대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다양한 종류의 곡조들은 각기 그에 알맞은 희곡 작품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지방극들이 나온 것이다. 전국 각 지방에서는 새로 일어난 지방극인 <난탄제강>이 나타났다. 이어서 '화부'의 난탄제강과 '아부'의 곤곡이 경쟁을 하였다. 그 즈음 베이징 극단에서는 고강·진강·휘조 등이 아부와 인기를 다투었다. 1779년에는 북곡계 '진강'의 여장 남자 배우 위장생이 베이징으로 나와 그 활동 범위를 넓혔다. 1790년에는 남곡 익양강계 '이황조(二黃調)'의 여장 남자 배우 고낭정이 베이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베이징에서 '화부'가 그 인기를 누리자 이는 연극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각 지역의 지방극이 발전되면서 오대성각 계통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방자와 피황 등 2계통이 가장 발달하여 이들이 선두 주자가 되었다. 또한 난탄제강의 우월한 세력과 희곡 예술의 대중화 등이 이루어졌다. 가경·도광 연간에 각 성강의 연관 관계와 합류로 각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종합적 대형극이 만들어졌다. 경극도 그 중에 하나로 손꼽히며, '이황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장경 등의 개혁을 통하여 '경극'으로 발전하였다. 베이징에서의 휘조와 한조가 한데 합쳐지는 것을 밑바탕으로 19세기 중반기에 형성되었다. 곤곡이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귀족 예술이었던 반면에 경극은 이해가 쉬우며 조리가 분명하고 시원시원한 단극이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에 맞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경극에는 독창적인 희곡 작품이 없었으며, 거의 전부가 전설·소설·연의·전기(傳奇) 등을 그 소재로 하여 고쳐 쓴 것이었다. 19세기 말까지의 중국의 전통극 형식은 마침내 경극으로 한데 모아져 완성되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서사적이며 상징적인 표현 양식은 거의 완벽에 이르는 경지의 예술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경극은 중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내용에 수정의 칼을 대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연극으로서의 탈바꿈을 위하여 13·16·18세기에 겪었던 중국 연극의 변혁에 상응하는 경극의 변질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연극의 역사는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종류도 무려 470여 가지나 된다. 또한 거의 전부가 각 지방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지방극이다. 중국 연극은 지방극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세계 연극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래의 기원은 지방극이던 것이 전국적으로 널리 전해진 연극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경극'을 비롯한 '남곤' '월극' '평극' '예극' '진강' 등이다.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산시방자와 천극·월극 등의 대형 지방극이 각 지방의 특색을 확고히 하면서 각각 완성되었다. 이 중에서 경극은 눈에 띤 발전을 거듭하여 베이징뿐만 아니라 상하이, 텐진까지도 빠르게 널리 퍼졌으며, 그 후로 나온 작품은 현실 정치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 많이 씌어졌다. 또한 현대 의상을 입고 하는 <시장신희> 등 눈에 띄는 시도가 있었다. 중국 연극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유럽의 연극·가극·무용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극은 20세기 초기에 들어와 전통적인 가무극에 대하여 '화극(話劇)'이라 칭해졌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1919년 5·4 운동과 더불어 신문화 운동이 펼쳐지던 가운데 '구극'의 모든 면을 부정하고 나서며 서양 화극의 보급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 시기에 경극에서는 탄진페이를 비롯한 뛰어난 배우가 출현하였다. 그 외의 각 장르에서도 우수한 배우가 많이 배출되어 유파를 형성해 가면서 예능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예술 교육을 위한 기구도 만들어졌으며, 이론적인 연구도 시작되었고 전문 잡지도 나오게 되었다. 연극 이론가이자 평론가인 치루산도 이 시기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여러 차례 해외 공연도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소재나 사상면에서 기본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의 신극은 1904년에 창립된 춘류사에서 비롯되었는데, 중심적인 인물은 극작가 어우양 위첸이었다. 그 뒤 1923년에는 극작가 톈한이 남국극사를 새로 만들어 배우와 연극인들을 양성하였다. 화극은 1920년대에 들어 미국 하버드 대학과 보스턴 연극 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돌아온 훙선에 의해서 본격적인 서양 근대극이 소개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훙선은 계몽적인 신극 이론을 펼치면서 1922년에는 군벌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의 <조염왕> 등 희곡을 발표하였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934년에는 차오 위가 4막으로 이루어진 <뇌우>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떨쳤고, 그 후로도 계속 <일출>(1935) <황야>(1936) 등의 명작을 발표하였다. 한편 1921년에 결성된 중국 공산당은 희곡을 대중 문화라고 평가하여 중요시하였으며, 1931년에는 상하이의 중국 좌익 작가 연맹에서 문예 대중화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5·4 운동 이후부터 지식층에 퍼져 있던 민간 문예 대중화에 대한 경시 풍조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항일 전쟁 시기에는 대다수의 연극인들이 위문 공연과 모금 운동 등을 통해 항쟁 운동을 벌였고, 일본군의 점령 시기에 베이징에서는 메이란팡과 청엔주 등이 공연을 거부하였다. 또한 텐한은 상하이·우한·창사 등 각지에 조직된 선전대의 항일 선전을 위해 많은 각본을 썼으며, 항일 근거지인 옌안과 유격 지구에서는 현실적인 투쟁을 줄거리로 한 작품이 지방극의 한 장르로 공연되었다. 1940년 무렵에는 민족 형식 문제에 대한 토론을 이루어졌으며, 1942년에는 마오 쩌둥이 <문예 강좌>를 발표한 뒤 '묵은 것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이에 의해서 옌안 평극 연구원의 신편 경극 최초의 작품인 <핍상 양산>이 나왔다. 한편 옌안에 있는 산베이 민요에 의한 양거극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밑바탕으로 한 신가극 <백모녀>가 나왔다. 또한 1942년에는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던 충칭에서 역사에서 그 소재를 얻어온 궈 모뤄의 화극 <굴원> 제작 공연되었다. 그는 역사극을 주로 썼는데, <채문희>(1959) <측천 무후>(1962)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50년에 제작 공연된 라오서의 <용수구>는 그의 희곡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나 해외 공연까지 이루어졌다. 1951년에는 마오 쩌둥이 갖가지 학문 예술이 함께 활발히 이루어진다는 '백화 제방 백가 쟁명'이라는 방침을 내놓았다. 그리고 극과 사람과 제도를 새롭게 뜯어고친다는 '희곡 개혁 공작에 대한 지시'가 발표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봉건적인 도제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극단이 다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연극인의 교육을 다시 실시하여 새로운 세대의 양성이 추진되었다. 한편 신작의 창작을 장려하였으며, 예전의 각본을 정리하여 새롭게 고쳐나갔다. 현대극은 1964년에 이루어진 경극 콩쿠르에서 간신히 완성을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경극에서 <홍등기> 등 현대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 나왔다. 그렇지만 상연 목록의 취사 선택에 대한 논쟁이 심하였고 희곡 정책을 실제로 시행하는 데도 많은 동요가 따라 발전을 제약하였다. 그것은 현대극을 중심으로 한다는 방침이 전통극을 억압하는 경향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전통극과 현대극에 신편 역사극을 아울러 발전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역사극 <해서파관>이 비판되기 시작하면서 1965년부터는 10년 동안 '문화 대혁명' 시기로 들어갔다. 마침내 이 일을 이끌어 나간 장칭 등에 의해서 이 시기에는 현대 경극과 발레 8종의 모범적인 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문화 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다시 '백화제방'의 강령으로 돌아감에 따라 희곡계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전통적인 상연 목록이 다시 쓰여지게 되었고, 현대극의 창작도 다시 제 궤도에 올랐다. 화극에 있어서도 50년대 라오서의 <다관>이 다시 공연되는 등 부활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오늘날 근대 이래의 희곡 개혁의 과제는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영화와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의 보급으로 관객의 취향이 바뀜에 따라 중국 연극은 전체적으로 현대화해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점에 부딪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통 연극은 시대에 발맞추어 가면서 민족적인 전통을 드러내는 것이 최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에는 여러 종류의 직업적인 극단이 형성되어 있고, 국립 극장과 극단이 운영되고 있으며, 각 성(省)과 시에는 각각 성립·시립 극장과 극단이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