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中國映畵)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인의 정서가 담겨져 있으며 중국 영화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 중국 영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는 1908년 베이징에서 촬영하여 만들어진 경극인 <정산군>이며, 시나리오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찍은 극영화는 1913년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난부난처>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부모의 뜻에 의하여 강제 결혼을 하게 된 남녀 간의 희비를 소재로 하였다. 이 것은 후에 중국 영화의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되는 반봉건주의적 주제를 다룬 최초의 작품이라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 영화는 그 뒤로 상하이·광둥·홍콩 등지를 중심으로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장 스촨은 중국 영화의 개척자로 불려지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태후> <불행아>가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아직 예술적인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1917년 난징에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수많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매란방이 주연을 맡은 전통적인 중국 무용담을 소재로 한 <천녀산화>가 주목받았다. 그 당시의 영화는 상하이를 중심지로 상영된 서양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자본을 바탕으로 장편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의 작품이 <대역죄> <연화락> 등이었다. 1922년에는 배우 양성 기관이 처음으로 개설되었으며, 커다란 영화 제작사로서 밍씽·톈이·렌화 등이 잇달아 설립되어져 제작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장 스촨·저우  컥æㅑ?정치우 등 세 감독이 협력 체제를 이루었다. 1923년에 발표된 장 스촨의 <고아 구조기>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영화사들의 합병이 잇달았으며, 그 해에 전설적인 여성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목란 종군>이 발표되었다. 이후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의 전기 영화가 널리 퍼져서 역대의 황후의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다. 또 인기있는 영화로는 원앙호접파라고 하던 재주있는 젊은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와의 연애를 다룬 것들이 있었다. 이 밖에도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에 촛점을 맞춘 통속 작품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가운데 여배우 쉬 친방이 출연한 <화소홍련사>(1928)도 큰 호응를 얻었다. 하지만 중국의 영화 산업은 발성 영화가 나옴에 따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원인은 중국 각 지방의 수많은 방언 때문이었다. 중국 영화는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과 1932년 상하이 사변이 일어남에 따라 각본가인 샤옌을 비롯한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밍싱이나 롄화 등의 영화사에서 영화 제작에 몸담게 되면서, 항일 구국·반봉건·반매판 자본 사상을 내포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1933년에 발표된 정부가오 감독의 <춘잠>을 비롯하여 장스촨 감독의 <지분시장> 등이 있다. <춘잠>은 농촌이 자본주의 원리에 의하여 파괴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며, <지분시장>은 직업 여성의 자립을 부르짖는 작품이었다. 1934년에 발표된 채추성의 <어광곡>은 특히 뛰어난 작품성을 지녔으며, 1936년에 발표된 위안 무즈의 <마로천사>와 3인의 신여성을 다룬 롼 링위의 <3개마등여성>은 모두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이러한 가운데 1930년대 중국 영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한국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염(1910∼1983)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의사인 아버지를 잃고 상하이로 건너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아 일하다가 1929년에 쏜 위 감독의 눈에 띄어 무성 영화 <풍류검객> <야초한화>의 주연으로 뽑혀 상하이에서 최고의 스타가 되어 인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1934년에 쑨 위는 <대로>를 감독하였는데 항일을 위한 청년들의 도로 공사 노역을 그린 그의 대표작이며, 중국 항일 영화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영화 주제가 <위대한 길의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될 정도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일본과의 대립을 피하고 중국 공산당과의 대결에 중점을 둔 국민당 정부는 직접적인 항일 표현과 함께 좌익적인 성향을 띤 부분들을 검열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탄압을 가하였다. 일본이 1937년에서 1945년에 걸쳐 중국에서 전쟁을 치루던 일제 침략기 사이에 일부 영화사가 문을 닫거나, 싱가포르·홍콩 등지로 옮기는 회사가 나왔다. 일부 영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서 다른 지방에 머무르며 항일 영화를 제작하였지만 나머지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긴 국민당 정부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우익성이 짙은 항일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촬영소가 서양 세력의 공간 거류지로 정하여진 조계지 안에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 무렵 부 완창 감독의 1939년 작품 <목란종군>이 제작되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당나라 때 한 여성이 북방 침략자와 맞서서 싸우는 내용을 담은 극풍의 영화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충칭 시대의 영화는 영화 자재 등의 부족으로 흥행이 부진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중화아녀> <동아지광> 등이 제작되었다. 항일 영화로는 1936년에 제작된 스둥산의 <우리가 땅을 지킨다>와 1938년에 제작된 <열혈충혼>, 1938년에 제작된 잉 윈웨이의 <800인의 용사>, 1940년에 제작된 <새산풍운> 등이 발표되었다. 그 밖에도 1939년에는 <화북은 우리의 것>, 1940년에는 <노백성만세> 등 일본의 침략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에게 촬영소가 점령 되면서 중국 국민에게 무의미한 내용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이 시기 마쉬웨이방 감독의 1943년 작품인 <추해당>이 민족적인 굴욕을 실랄하게 표현한 것은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중·일 전쟁이 종결되면서부터 중국이 성립되기까지는 제2의 영화의 황금 시대였다. 전쟁이 끝나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1947년에는 스 등산의 <팔천리도운월>, 차이 추성이 1947년에 제작한 <봄의 강이 동으로로 흐른다> 등은 일제 침략기의 민족적 비극과 국민당 정부의 부패상을 비판한 작품들이 나왔다. 1947년에는 쌍후 감독의 부르주아적인 지성 코메디인 <태태만세>, 1948년에는 페이무 감독의 연대심리극을 다룬 <소성지춘>이 나왔고 1949년에는 정 쥔리 감독의 <까마귀와 참새>가 발표되었다.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의 영화는 초기에는 모든 영화를 국유화시켰고 사회주의 체제의 선전 수단으로 변화되었다. 초기에는 소박한 선전 영화로 왕빈과 수이화 감독의 <백모녀>가 1950년에 제작되어 국제 무대에 소개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선전한 혁명 영화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는 퇴보를 가져왔다. 그런 중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뛰어나게 실현시킨 작품이 나왔는데, 1959년 제작된 수이화 감독의 <임가포자> 1963년에 제작된 셰테리 감독의 <조춘이월> 1965년 제작된 셰진(사진) 감독의 <무대자매> 등이 그 것들이다. 이로써 중국 영화는 제3의 황금기에 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966년 무렵부터 10여 년 간 걸쳐 사회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행하여지는 구문화의 비판적 극복을 위한 노력·문맹의 근절·인텔리겐차의 재교육·사회주의적 문화의 육성 등 광범위하게 펼친 문화 대혁명기에는 기존에 제작된 영화들을 부르주아적이라고 몰아서 영화 감독을 추방하면서 영화의 제작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이를테면 중국 영화계는 다시 암흑기를 맞은 것이다. 문화 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사회가 안정되어, 영화 제작의 움직임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의 질이 많이 향상되었다. 이 중에 문화 대혁명을 비판한 영화로 대표적인 것은 1980년에 제작된 셰진 감독의 <천운산 이야기>, 1983년에 제작된 바이천 감독의 <상하이에 가설되는 다리> 등이다. 특히 문화 대혁명 이후에 나온 베이징 영화 학교 출신의 제5세대 감독들의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작품 성향은 예술 영화의 표현에 민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자기 동일성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84년에 제작된 천 카이거 감독의 <황토지>를 비롯하여, 1986년에 제작된 <대열병>, 1984년에 제작된 우 톈밍 감독의 <인생>, 1985년에 제작된 황 젠신 감독의 <흑포사건>, 1987년에 제작된 장 이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 1984년에 제작된 톈 좡좡 감독의 <도마적> 등이 있다. 1980년 이후 중국 영화가 국제 무대의 진출이 가능하게 되어 천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1993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상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셰페이 감독의 <향혼녀>가 1993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톈 좡좡 감독의 <푸른 연>이 1993년 도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상을, 장 이모 감독의 <산다>가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한편, 홍콩 영화는 중·일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의 점령하에 놓였던 상하이의 영화인들이 반역자로 몰리는 것을 염려하여 홍콩으로 도피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대륙 출신의 영화인들을 담은 가부장적인 위계 질서와 함께 유교적인 세계관을 담은 무술 영화가 한 부분을 차지하며 발전하게 시작하였다. 활극·모험·쿵푸 영화를 중심으로 중국의 옛 전쟁 이야기에서 소재를 택한 오락 영화가 유럽 시장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대중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았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67년에 제작된 <용문의 결투>와 1968년에 제작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가 있으며, 이후 왕우의 외팔이는 시리즈로 나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1971년에 제작된 <당산대형>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블루스 리를 국제적인 대스타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1973년에 젊은 나이로 죽자, 1970년말에는 <취권>을 통하여 자키 쳰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느와르인 액션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황비홍>과 같은 정통 무술 영화가 나와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방불패> <황비홍>을 제작한 서극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왕 자웨이의<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투게더>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