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음악(中國音樂) - ☞ 계몽출판사 웹백과 인용

중국에서 발생하여 발달한 음악. 특히 한족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음악을 가리킨다. 중국은 서아시아 및 인도와 더불어 아시아 3대 문명지의 하나로서 음악 분야에서도 오랜 역사와 뛰어난 전통을 자랑한다. 연주 기법뿐만 아니라 음악 이론도 오래 전부터 발달하여 우리 나라·일본·몽골·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동아시아 음악 문화권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음악의 종류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아악은 봉건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생겨나 유가의 예법과 음악 사상인 예악 사상에 기조를 두고 오랜 세월 지배계층에게 호평받던 음악이었다. 궁정과 귀족 계급 사이에서 애용되었던 예술과 오락 음악이었으며, 금악은 지식계층인 사대부가 즐겼던 음악이다. 또한 희극의 모태인 산악 그리고 군대에서 쓰이는 군악 등이 있었다. 서민들 사이에 애용되던 음악으로는 이야기 형식의 설창·민요·희극 등을 들 수 있다. 고대로부터 음률 산정법에 의하여 동양 음계의 12음계인 십이율과 7음계인 칠성이 이룩되었으나 중세 이후에는 단순하게 변형되어 현재의 오음계로 변하였다. 이 음계를 통하여 나오는 선율과 두 박자 계통의 박절적 운율을 통하여 중국 음악은 독특한 맛이 난다. 또한 중국 음악의 특징은 활기차면서도 슬픔에 잠긴 듯한 폭넓은 표현력을 들 수 있다. 중국 음악의 역사는 고대·중세·근세·근현대로 구분하다.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임금으로 천황씨·지황씨·인황씨, 또는 수인씨·복희씨·신농씨, 또는 복희씨·신농씨·황제인 삼황과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인 소호·전욱·제곡·요·순의 오제가 나오는 전설 시대의 원시 음악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시경> <서경> <예기>의 문헌 등에 따르면 전설 속의 황제가 음의 높이를 규정하기 위하여 대나무관인 율관을 사용하여 음률을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복희에 의하여 거문고인 금과 비파인 슬이 만들어졌고,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 여와에 의하여 생황인 생과 피리인 우가 만들어졌다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은나라와 주나라 이전의 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는, 천지에 제사를 올려 풍작을 기원하는 무속적인 원시 종교 의식에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 책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은나라 시대에는 제사 의식에 필요한 가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경·북·소·훈 등과 같은 악기와 원시 형태의 금과 슬도 나타났다. 주나라 때에는 왕실이나 봉건 제후들에 의하여 왕실, 또는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의식인 전례를 위한 아악이 만들어졌다. 아악은 유가의 예절과 음악 사상인 예악 사상의 밑거름이 되어 후세의 지배 계층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춘추 전국 시대의 공자는 어금니 소리인 아성과 음란하고 속된 음악인 정성을 나누어 유가의 예악으로서 아성을 중요하게 다루어서 이것이 아악 관념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많은 악기가 제작되었고,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5성(五聲)이 발견되었다. 또한 중국 음악에서 악률을 제정하기 위하여 생긴 계산법인 삼분 손익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의 일로써 12율과 함께 그 명칭이 이루어졌다. 종(鐘)·경(磬)·금(琴)·슬(瑟)·관(管)·약·생(笙)·훈(壎) ·부(缶)·축·어·고(鼓) 등의 아악기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원구단·종묘·문묘 등의 나라의 제사 때에 악생 64인을 8열로 정렬시키어 추게 하는 규모가 큰 팔일무도 이루어졌다. 기원전 2세기∼서기 2세기의 한나라 통일 왕조 때에는 주나라의 아악이 크게 융성되어 아악을 관장하는 태악서가 만들어졌으며, 속악도 발달하게 되었다. <시경>과 <초사>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민요도 생겨났으며, 이것을 궁정에서 끌어들여 예술로서 발전시켰다. 주나라 이후 율방에서 연주되던 작은 인원에 의한 합주곡인 방중악은 금석류의 악기에 의하여 연주되는 아악과는 다르게 관현악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또한 민간 가요를 주연석상에서 연주된 음악인 연악으로 연주하였다. 또한 아악을 관장하는 태악서에 가사나 악률을 제정하기 위하여 악부는 관서가 만들어졌으며, 청상삼조와 같은 속악이 연주되었다. 그 무렵 연악의 악기와 구성은 1972년 마왕퇴한묘로부터 출토된 금·슬·십이율관과 같은 악기와 주악목용과 함께 고분 벽화의 신선·성현·효자·조수·거마 등의 화상을 궁전·사당·분묘의 벽면에 새겨 붙인 화상석으로 보아 예측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장건의 서역 원정에 의하여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현악기의 한 종류인 비파와, 서양의 하프와 음색 및 모양이 비슷한 악기인 공후 등의 서역 악기와 음악, 춤이 전파되었으며 뒤에 산악의 모태가 된 갖가지 연희로 가면놀이·곡예·요술 따위의 백희와 곡예를 포함한 원시적 연희인 잡희가 퍼져나갔다.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인도 고대 음악도 서역(新疆省)을 거쳐 중국에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국제 음악 시대는 5세기에서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에 이르기까지이어졌다. 남북조 시대에는 화베이가 북방 민족에 의하여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한족은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함에 따라 양자가 서로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조가 북방의 민족의 문화와 서역 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인데 비하여 남조는 아악과 속악과 같은 전통적인 아악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나라 이래 중국 고유의 가곡인 속악과 주변 민족의 음악인 호악을 중요히 여겨 연주하였다. 581년에는 호악과 속악 중 대표적인 것을 뽑아 내어 서경악인 국기·한대 속악인 청상기·고구려악인 고려기·인도악인 천축기·부하라악인 안국기·고차악인 구자기 제례를 마칠 때 쓰이는 문강기 등의 칠부기를 만들었다. 수나라 양제대에 이르러서는 카슈가르악인 소륵기와 사마르칸드악인 강국기 등을 첨가하여 구부기가 되었다. 대제국을 이루었던 당나라는 궁정과 국가의 예술 음악이 꽃피게 되어 중국 음악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그 특징은 국제성과 귀족성을 띠고 있었다. 먼저 역대 왕조를 그대로 모방한 아악은 일찍이 그 전래를 볼 수 없었을 정도로 큰 규모로 구성되었다. 또한 수나라의 구부기로부터 문강기를 없애고 신작 대곡의 연악기와 투르판의 고창기 등을 새롭게 더하여 십부기를 이루었다. 국가의 궁정 행사에서는 연향악을 주축으로 하여 연주하였다. 이러한 음악들은 태상시의 태악서에 포함되어 전례악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종 때가 되어 교방이나 교방과 태상시 가운데 우수한 악공을 뽑아놓은 이원에서 연주하도록 하여 8세기 초에서 9세기 말엽까지 이백·두보·왕유·맹호연 등의 시인이 활동하던 시기의 음악인 성당음악은 오락성을 지니면서도 예술화하여 절정에 도달하였다. 또한 새롭게 시작된 연향악 14곡을 묶어 8곡의 입부·6곡의 좌부 등의 이부기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호악과 속악이 서로 합쳐져서 당속악이 이루어졌다. 한편, 한족이 자력으로 독자적인 음악을 전개한 시대로서 근세의 민족 음악 시대는 10세기에서부터 청나라 말기인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였다. 907년 당의 멸망 후 960년 송의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후당·후량·후진·후한·후주 등 다섯 왕조의 전란기에는 음악의 발달이 일시적으로 멈추어졌으나 송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아악이 흥하게 되었다. 뛰어난 유학자가 나왔으며, 음악에 대한 논의가 활기를 띠게 되어 채원정의 <율려신서>와 진양의 <악서>와 같은 음악 서적과 강기의 <백석도인가곡>과 같은 시가집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서민 음악이 극악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극장인 구란에서 공연되는 이러한 잡극은 단순하게 만들어진 가극이었지만 이것이 원나라의 연극인 남극과 북극의 총칭인 원곡과 명나라의 고대 희곡의 한 파인 곤곡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잡극과 더불어 설창이라고 하는 낭창 음악(낭송 음악)이 호평을 받았다. 또한 당나라 때에 나온 사악은 북의 반주가 중심이 되는 북방의 고사와 비파가 중심인 남방의 탄사로 구분되어 발달되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조정과 민간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크게 유행을 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 몽골 민족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슬람 음악으로부터의 영향도 받게 되어 현재 호금 또는 이금이라고 불리어지는 중국의 활로 연주하는 현악기인 호궁이 이슬람의 호궁인 라바르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원나라에 들어서서 전 시대의 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반대로 연향악에서 특색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민요가 활기를 띠어 산곡이라 일컫는 민간 가곡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한족에 의하여 세워진 명나라 왕조 때에 이르러 아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미 오래된 제도가 사라지고 우아한 것과 속된 것이 혼합하여 교차하는 아속혼교의 상태로 되어 새로운 제도를 쫓게 되었으며, 속악은 민간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장쑤성의 쿤산에서 연유되어 나온 위양보가 남곡의 일파인 해염강과 익양강을 본받아 시작한 고대 희곡의 한 파인 인곤곡이 다른 여러 희곡보다 한층 더 유행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때 나온 거문고·가야금·향비파의 세 가지 현악기를 말하는 삼현이 희극과 더불어 점점 국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강희제와 건륭제 때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의 제도에 근거하여 나온 아악이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공자묘의 제례악도 구비되었지만 일부분의 새로운 제도에 지나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거문고·가야금·당비파의 삼현과 해금 따위의 활교로 연주하는 호궁·가는 피리를 뜻하는 적·비파·퉁소와 같은 합주곡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희곡이 최고조로 발달해 각지에서 독특한 개성을 띤 연극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중반기에 서피희와 관계가 있는 이황극이 북경에 흘러들어가서 피황극이라 하는 경극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유행하는 창극으로 발전하였다. 근현대의 음악 시대인 중화 민국이 들어서게 되자 청나라 왕조의 멸망과 함께 궁정 아악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묘의 제례악 가운데 일부분은 타이완을 주축으로 지금도 보전되고 있다. 음악 교육면에서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의 서양 음악의 수법을 받아들인 전통 악기에 적합한 호궁곡과 비파곡 등이 작곡되었다. 이러한 음악적 변화는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도 창작·연주·연구·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발전되었다. 문화 대혁명 때는 경극을 주축으로 하여 현대적인 소재와 서양 음악 수법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새로운 작품이 탄생되었다. 또한 전통 악기의 개량과 함께 서양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서 차지하는 자리인 성부에 맞는 대합주곡의 연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족적인 소재의 서양 악곡이 쏟아져나온 적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오래된 악보의 해설과 고대 악기를 되살리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 옛곡을 다시 되살려 연주하는 일도 많았다.